작품주의 — 디자이너와의 대화에서
팀 회고 자리에서 디자이너가 이런 표현을 했다.
내가 디자인한 건 “내 새끼” 같다.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아끼는 자식처럼 생각하고, 잘 나가서 사랑받기를 바란다.
그래서 피드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, 피드백이 들어올 때 순간적으로 “경계모드”가 켜진다고 했다.
이 말을 듣고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. 주니어 디자이너의 흔한 생각이라 익숙하기도 했고, 동시에 “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난 것”이라는 비평적 관점이 떠올랐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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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난 것”
내 첫 반응은 이론적이었다.
-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난 것이다
- 작품은 그것만의 삶을 살아간다
- 작품의 가치는 작가의 평판이나 삶과 관련없이, 작품으로써 평가해야 한다
- 작품으로써 살아남기도 하고, 작품으로써 죽기도 한다
이 생각은 롤랑 바르트의 「저자의 죽음」(La mort de l’auteur, 1967)과 맞닿아 있다. 바르트는 텍스트의 의미가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텍스트 자체와 독자의 해석에 있다고 주장했다. 신비평(New Criticism)이나 형식주의(Formalism)도 비슷한 맥락 — 작품 자체에 집중하라는 입장. “작품주의”라는 정식 용어는 없지만, 이 흐름들을 관통하는 태도다.
하지만 그 디자이너에게 바르트니 신비평이니 하는 이야기를 설교하듯 꺼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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리프레이밍 — “내 새끼” 의식은 나쁜 게 아니다
반대로 생각해보니:
- 그 사람의 인식이 잘못된 건가?
- 오히려 좋은 직무의식, 직무윤리 아닌가?
- 그만큼 중요하게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
“내 작품이 내 아이와 같다”는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다. 문제는 그 아이를 어떻게 대하느냐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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투영과 보호 — 두 축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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투영의 정도 — 그 아이를 나에게 얼마만큼 투영할 것인가?
- 아이 = 나의 연장선 (문제)
- 아이 = 독립적 존재 (건강한 분리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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보호의 정도 — 경계모드처럼 아이를 얼만큼 보호할 것인가?
- 외부로부터 영향받지 않게 차단할 것인가?
- 아니면 외부 피드백을 아이가 성장하는 양분으로 볼 것인가?
“저자의 죽음”은 “작품에 무관심하라”는 게 아니라, 작품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건강하게 분리하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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같은 회고에서, 엔지니어로서
같은 자리에서 나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했다:
- 코드를 타이핑하는 시간은 원래도 길지 않았는데, 그 즐거운 시간마저 AI에게 뺏겨버린 느낌이다
- 오히려 문제를 발견하고, 정의하고, 크고 작은 의사결정을 하는 역량이 더 중요해졌다
- 그런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느낀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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AI 시대, “내 새끼” 의식은 살아남을까
디자인도 영상도 마찬가지다. 산출물을 내기가 쉬워진 시대, 갈고 닦는 과정이 많이 생략되어가고 있다.
이런 상황에서 “아이로 바라보는 마음”은 사라질 수도 있다. 왜냐하면:
- 공수가, 갈고 닦는 공수가 줄어드니까
- 마이너한 의사결정들은 점점 안 하게 되니까
노력과 애착의 상관관계: 손이 덜 갈수록 “내 새끼” 감정도 옅어지는가?
이것이 단순히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다. 하지만 무언가가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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마치며
그 디자이너의 “내 새끼” 의식은 책임감의 표현이다. 나쁜 것이 아니다. 곧 아이가 태어날 걸 기다리는 아빠로서, 무언가를 아끼고 지키고 싶은 그 마음이 진심으로 이해된다. 그 자리에서 바르트니 신비평이니 꺼내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한다.
하지만 나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. 나는 내 결과물에 애착이 있지만, 그것을 나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. 내 작업물은 내 손을 떠나면 알아서 성장하고, 알아서 평가받는다. 작품으로서 살아남기도 하고, 작품으로서 죽기도 한다. 그게 건강한 분리다.
피드백이 들어올 때 “경계모드”가 켜지는 게 아니라, 오히려 반긴다. 외부의 시선은 작품이 성장하는 양분이니까.
- ai-native-mindset - AI 시대에 달라지는 엔지니어의 역할